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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평화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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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애도 댓글 0건 조회 1,206회 작성일 07-10-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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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부터 이 공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실제로 있었던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리려합니다.  이 공간이 어느정도 채워질때즈음이면 여러분들은 2,000여명의 아들딸들의 엄마인 저에 대하여 그리고 평화원에 대하여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알게 될것이랍니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들을 준비가 되었나요?
그렇다면 자~ 이야기속으로 떠나봅시다.

  나는 1927년 3월 10일. 황해도 연백군 옥야리라는 아주 작고 양지바른 초가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해주 최씨 후손으로 과거에 낙방한 후 작향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성실한 농부로 사셨고, 어머님은 정승반열 집안의 일곱 자매 중 맏이였다.  권위만 중시하던 여느 아버지들과는 다른 아버님 덕에 집 안팎은 늘 깨끗하였으며, 가지런한 밭고랑에서는 야채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 잊혀지지않는다.
 
  고향 뒷동산 중턱의 40평 남짓한 초가집이 내가 다니던 교회다.  높은 종각 밑으로 늘어진 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는 나라없는 백성에게 평안을 주곤 하였다.  마음 따스하고 평화로운 교회였다.  출입문이 양쪽으로 나 있는데 한쪽은 남자가 다른 한쪽은 여자가 들어갔다.  따로따로 들어간 남자와 여자는 각각 다른 줄에 맞추어 앉았고, 남자와 여자 사이사이에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으셨다.

  나는 모태적부터 이 교회를 다녔다.  아홉살부터 나는 교회로 올라가는 길가에 코스모스, 과꽃,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등의 꽃을 열심히 심었고 친구들과 물을 주고 풀도 뽑아 주었다.  매일아침 먼저 뛰어가서 이꽃들을 둘러보고 물을 준 뒤 학교로 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소학교의 교장은 '스나가'라는 뚱뚱하고 심술궂은 일본사람이었다. 매달 오륙십 전의 월사금을 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어 대부분의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나는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스나가 교장이 일본역사를 가르쳤는데, 기독교를 박해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이 제일 싫었다.  게다가 우리 나라 말을 하다 들키면 역사점수를 무조건 영점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나의 역사점수는 늘 형편이 없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교회 친구 이은애와 고광애다.  은애는 15세에 폐병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광해는 해방 후 우리 교회에서 아동부 선생을 하다가 6.25전쟁 후 남쪽으로 내려와 장로가 되었고 지금은 나처럼 아동생활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화장실 청소나 풀 뽑기 등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선생님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였고 신사참배 외에 벌받을 일이 없었다.  어린마음에도 예수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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